金行政書士事務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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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3月7日月曜日

『脱北者ではありません、韓国の国民です』 ③

韓国ドラマを見ながら幸せな生活を夢見たのに・・・



[ソウル新聞] 2016-02-01                                           (日本語翻訳者:金行政書士事務所)



「私は命をかけて北朝鮮の鴨緑江(中国との国境)を越えました。中国やタイで生きた心地のしない地下生活も経験しました。しかし、この地の冷たい視線と偏見の壁は到底超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今はむしろ気楽です、すべてを諦めましたから。」

ソウル新聞が取材した脱北者の多くは「敗者」という劣敗感を共通して持っていた。韓国資本主義社会の「経済的自由」は、むしろ彼らに不可能な未来への希望だけを膨らませた「希望拷問」だった。

2008年に脱北したイ・ミンジョンさん(32歳・女性)は、昨年5月に京畿道のある自動車部品会社に就職した。給料は最低賃金水準である130万ウォン。しかしこの仕事は入国して7年間北朝鮮訛りを直してやっと就職に成功した。しかし、昨年結婚した夫と正式に結婚式を挙げるのは遠い夢のようだ。毎月の給料から北朝鮮にいる家族にお金を送金すると残った生活費は食べるのもやっとだからだ。

「これまでコンビニ、レストラン、PCルームなどで働きましたが、私が脱北者だと知るとほとんどの社長は目つきが急に変わります。その日から追い出す口実だけを探したり、給料を踏み倒されたことも複数回ありました。抗議すると「君は誰のおかげで支援金を受けてこの地で住めるようになったと思うのか」とかえって怒りをぶつけられました。」

キム・ジンスクさん(34歳・女性)は、2005年9月、中国へ商売に行ったときに人身売買に遭い強制的に売春を強要された。2008年10月ようやく脱出して韓国に来た。彼女は「私を受け入れてくれた韓国に対し感謝の気持ちはあるが、会社での差別は耐え難い」という。 「私が勤める工場は、従業員が60人ほどですが脱北者は私だけです。 30%は韓国人、70%は朝鮮族で、私は朝鮮族よりも低い待遇を受けます。」

高学歴脱北者も事情は変わらない。サービス業は訛りや動作が「脱北者ぽい」という理由で面接に落ちるのが常である。

昨年8月、ソウルにある4年制大学を卒業したバク・ミヨンさん(32歳・女性)は、「韓国で生まれ育った若者たちも就職への道は「針の穴」なのに、私たちはどれほどか」とし「北朝鮮で韓国ドラマを見ながら幸せな生活を夢見たが、それは本当に幻想だったようだ」と述べた。


●仁川市南洞区に最多居住・・・平均賃金147万ウォン


国内居住脱北者数は昨年末で2万8459人である。人口1700人に1人である。最も多く住んでいる地域は仁川市南洞区だ。政府が支援するアパートがあり、周辺の南東工業団地に働き口も多いからである。

1月31日、統一部によると、広域自治団体別脱北住民数は、京畿道(7647人)、ソウル(6815人)、仁川市(2469人)の順で集計された。

全体の60%ほどである1万6931人が首都圏に集中している。このうち、仁川市南洞区は全体の脱北者の6.2%である1757人が住んでいる。

ソウルでは、陽川区(1165人)、蘆原区(1104人)、江西区(983人)の順だった。 3つの区に脱北者の支援団体であるハナセンターがあるためとみられる。

脱北者の雇用率は少しずつ改善され、生活保護受給者数は徐々に低くなっているが32.3%(2014年基準)として、国民全体の2.6%に対し1​​2.3倍に達した。雇用率も53.1%と上昇したが、国民全体の雇用率である62.1%を下回った。脱北者の平均賃金は、147万ウォンで、労働者平均賃金の223万ウォンの3分の2の水準だった。

脱北者の入国は、2009年2914人で最高を記録したが、2012年キム・ジョンウン体制以降減り、昨年は976人にとどまった。


【国内脱北者数の推移】

1998年まで・・・947人
2001年・・・・・・1990人
2004年・・・・・・6315人
2007年・・・・・・1万2281人
2010年・・・・・・2万400人
2013年・・・・・・2万6122人
2015年・・・・・・2万8795人

(出典資料:統一部)



《韓国語原文》

“南드라마 보며 행복 꿈꿨는데… 조선족보다 못한 대우”


[서울신문]
“제가 목숨을 걸고 압록강 사선을 넘은 사람입니다. 중국이나 태국에서 가슴 졸이며 지하 생활도 했었지요. 하지만 이 땅의 차가운 시선과 편견의 벽은 도저히 넘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지금은 오히려 홀가분해요. 모든 걸 포기했으니까.



서울신문이 만난 탈북자의 상당수는 ‘낙오자’라는 열패감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자유’는 오히려 그들에게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기대만을 키우는 ‘희망 고문’이었다.

2008
년 탈북한 이민정(32·여·가명)씨는 지난해 5월 경기도의 한 자동차부품 회사에 취직했다. 월급은 최저임금 수준인 130만원. 그나마 입국 7년 만에 북한 억양이 줄면서 취업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난해 혼인신고를 한 남편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꿈같은 얘기다.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면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

“그동안 편의점, 식당, PC방 등에서 일했는데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부분 사장님의 눈빛이 확 달라져요. 그날부터 쫓아낼 구실만 찾고. 월급을 떼어먹는 경우도 여러 번이었어요. 항의라도 하면 ‘네가 누구 덕에 지원금을 받고 이 땅에 발붙여 사는데’라며 오히려 더 화를 냈죠.

김진숙(34·여·가명)씨는 2005 9월 중국에 장사를 하러 갔다가 인신매매를 당해 강제로 성매매를 하게 됐고 2008 10월 간신히 탈출해 한국에 왔다. 그는 “나를 받아 준 한국에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회사 안에서의 차별은 참기 힘들다”고 말했다. “제가 다니는 공장은 직원이 60명 정도인데 탈북자는 저뿐이에요. 30%는 한국인, 70%는 조선족인데 저는 조선족보다 더 낮은 대우를 받아요.

고학력 탈북자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직은 억양 및 행동이 ‘탈북자스럽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떨어지기 일쑤다.

지난해 8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박미영(32·여)씨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도 취업문이 바늘구멍인데, 우리는 오죽하겠느냐”며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행복한 삶을 꿈꿨는데, 그건 정말 잘못된 환상이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인천 남동구 최다 거주… 평균임금 147만원 받아


[서울신문]
국내 거주 탈북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2 8459명이다. 인구 1700여명 중 한 명꼴이다. 가장 많은 곳은 인천 남동구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아파트가 있고 주변 남동산업단지에 일자리도 많기 때문이다.

31
일 통일부에 따르면 광역자치단체별 탈북 거주민의 수는 경기(7647), 서울(6815), 인천(2469) 순으로 집계됐다.

전체의 60%가량인 1 6931명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이 가운데 인천 남동구에는 전체 탈북자의 6.2% 1757명이 살고 있다.

서울에서는 양천구(1165), 노원구(1104), 강서구(983) 순이었다. 3개 구에 탈북자의 국내 적응을 돕는 하나센터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탈북자의 고용률이 조금씩 개선되면서 생계급여 수급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지만 32.3%(2014년 기준)로 국민 전체의 수급률인 2.6% 12.3배에 달했다. 고용률도 53.1%로 올랐지만 국민 전체의 고용률인 62.1%를 밑돌았다. 탈북자의 평균임금은 147만원으로 전체 근로자 평균임금인 223만원의 3분의2 수준이었다.

탈북자 입국은 2009 2914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2012년 김정은 체제 이후 줄어들어 지난해에는 976명에 그쳤다.